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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어디까지 위임될 수 있는가

📑 목차

    인간, 언어, 그리고 시스템의 경계

    앞선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영어는 판단을 개인의 직관적 결단에서 분리해 문장 구조로 이전시키는 언어로 발전해 왔다. 정의·조건·결과로 이어지는 명제적 문장 구조는 판단을 감정이나 경험에 맡기지 않고, 검토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형태로 외부화한다. 이러한 구조는 지식이 기술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현대 사회의 법, 과학, 행정, 교육 시스템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하나의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판단이 문장 구조로 이전되었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판단을 언어에 위임하고 있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이 구조를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주체가 기계라면, 판단의 책임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판단의 외부화와 자동화의 차이

    판단이 언어 구조로 외부화되었다는 사실은 곧 판단이 자동화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영어는 판단을 제거하지 않았고, 대신 판단이 작동하는 형식과 절차를 구조화했다. 전제는 명시되고, 조건은 나열되며, 결과는 특정 범위 안에서만 유효하도록 제한된다. 이 과정에서 판단은 개인의 내적 결단이 아니라, 문장으로 구현된 규칙의 조합으로 표현된다.

    중요한 점은, 이 구조가 누가 판단했는가보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결론이 도출되었는가를 중심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판단의 정당성은 화자의 신뢰도나 도덕적 권위가 아니라, 전제의 타당성과 논리적 연결성에 의해 평가된다. 이는 판단의 책임을 흐리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위치를 개인에서 구조로 이동시키는 변화에 가깝다.

    판단의 경계와 책임
    판단의 경계와 책임

    시스템은 판단을 수행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판단은 이미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다. 대출 승인, 위험 평가, 정책 시뮬레이션, 의료 진단 보조, 교육 평가 등은 모두 조건 기반 구조를 통해 판단을 산출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영어 기반 문서와 규칙, 정의를 토대로 설계되며, 판단 과정은 문장 구조에 가까운 형태로 코드화된다.

    그러나 시스템이 판단을 수행한다고 해서, 그 판단의 책임까지 시스템이 지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은 정의된 조건과 규칙을 실행할 뿐이며, 그 규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떤 조건을 포함하고 어떤 조건을 배제할 것인지는 여전히 인간의 결정에 속한다. 이 지점에서 판단의 자동화와 책임의 위임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영어 구조가 제공한 것은 판단의 절차화이지, 판단의 대체가 아니다. 영어는 판단을 기계에 넘길 수 있을 만큼 명확한 구조를 제공했지만, 그 구조를 설계하고 수정하며 통제하는 책임은 인간에게 남아 있다.

    교육에서 드러나는 판단 구조의 영향

    이러한 판단 구조는 영어 교육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어 교육은 단순히 어휘나 문법을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조건을 설정하고, 전제를 검토하며, 결론을 잠정적으로 제시하는 사고 방식을 학습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어 글쓰기에서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정답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전제와 조건을 명시하고 결론의 범위를 제한하는 작업이다.

    이는 영어가 ‘확답을 요구하는 언어’가 아니라, ‘판단 과정을 드러내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며, 결론의 정확성보다 논증의 구조를 평가한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영어가 게르만어적 굴절 체계를 잃은 이후 선택한 언어 구조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판단 구조의 한계와 윤리적 질문

    판단이 구조화되고 시스템화될수록, 새로운 문제도 등장한다. 조건 설정이 불완전하거나, 정의가 편향되어 있을 경우, 시스템이 산출하는 판단 역시 왜곡될 수 있다. 이때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언어적 정의와 전제 설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기술적 오류는 종종 언어적 오류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영어는 판단을 안전하게 만드는 동시에, 판단의 위험을 드러내는 언어이기도 하다. 영어 문장은 언제나 조건을 요구하고, 예외를 설정하며, 유효 범위를 명시한다. 이는 판단을 절대화하지 않기 위한 장치이지만, 동시에 판단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게 만든다.

    영어 이후의 판단은 어디로 향하는가

    영어가 만들어낸 판단 구조는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공지능과 자동화 시스템이 확산될수록, 정의와 조건, 예외 규정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가능성이 높다. 미래의 언어가 영어를 대체하더라도, 판단을 명제화하고 구조화하는 방식 자체는 계승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판단은 완전히 위임될 수 없다. 언어는 판단을 외부화하고 시스템화할 수는 있지만, 판단의 기준을 설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주체는 여전히 인간이다. 영어는 이 경계를 흐리게 만든 언어가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를 드러내는 언어다.

     

    다음 글에서는
    '판단을 가르치는 언어: 영어 교육은 사고를 어떻게 훈련하는가'를 주제로,
    영어 교육이 단순한 언어 학습을 넘어 어떤 사고 방식과 판단 습관을 형성해 왔는지를 교육사적·언어사적 관점에서 분석할 예정이다.

     

    본 콘텐츠는 영어의 구조와 판단·평가 시스템의 관계를 다루는 정보성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