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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왜 판단을 문장 밖으로 밀어냈는가

📑 목차

    - 주체가 사라지고 구조가 결정하는 언어

    앞선 글에서 우리는 영어 문장이 어떻게 조건, 전제, 결과의 구조를 통해 사고를 자동화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구조는 인간이 판단하기 전에 이미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문장 내부에 질서를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등장한다. 영어 문장 안에서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그리고 그 판단의 책임은 어디에 놓이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판단’이라는 행위가 언어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어 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언어에서 판단은 화자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단정적인 종결, 명확한 평가 어미, 확신을 드러내는 문장 구조는 판단의 주체가 명확히 드러나는 방식이다. 누가 판단했는지가 문장 표면에 남는다.

     

    그러나 영어는 이 방식에서 점점 멀어졌다. 영어 문장은 판단을 강조하기보다 판단이 이루어지는 조건과 경로를 먼저 제시한다. 화자의 결론은 문장의 중심에 놓이지 않고, 구조의 끝이나 문맥 속으로 밀려난다. 이 변화는 화자의 태도가 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판단의 책임이 개인에서 구조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주체가 사라지고 구조가 결정하는 언어
    주체가 사라지고 구조가 결정하는 언어

     

    영어에서 판단은 더 이상 “내가 이렇게 본다”라는 선언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이 조건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라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문장은 판단을 직접 수행하지 않고, 판단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설정한다. 판단은 문장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주체의 역할이 크게 달라진다. 전통적인 언어에서 화자는 판단의 중심에 서 있지만, 영어에서는 화자가 판단의 설계자가 된다. 화자는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조건을 제시하고, 전제를 배열하며, 결과가 따라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판단은 이 구조를 통과한 독자의 몫이 된다.

     

    이 방식은 영어 학술 문체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학술 영어에서 저자는 결론을 단정하지 않는다. 대신 자료, 조건, 분석 과정을 차례로 제시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결론은 하나의 선택지처럼 제시되며, 언제든 수정될 수 있는 상태로 남는다. 판단은 고정되지 않고, 구조 안에 유예된다.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영어 법 문장은 판결을 내리지만, 그 판결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의 적용 사례로 기록된다. 판단은 사건의 성격, 조건,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문장은 이를 전제로 설계된다. 이 때문에 영어 법 언어는 단정적이기보다 조건적이며, 판단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한다.

     

    이러한 언어 구조는 판단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을 안정화한다. 개인의 감정이나 직관에 의존한 판단은 상황이 바뀌면 흔들리기 쉽다. 반면 구조에 위임된 판단은 조건이 바뀌면 결과도 함께 조정된다. 판단의 유연성이 언어 구조 차원에서 확보되는 것이다.

     

    영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조동사와 완곡 표현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may, might, could, tends to 같은 표현은 확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판단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열어두기 위한 장치다. 영어는 결론을 닫지 않음으로써 판단의 책임을 특정 순간에 고정하지 않는다. 판단은 언제나 갱신 가능한 상태로 유지된다.

     

    이 점에서 영어는 판단을 회피하는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판단을 개인의 선언에서 분리해, 구조적 과정으로 재배치한 언어다. 누가 옳은지를 말하기보다, 어떤 조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판단은 구조가 담당하고, 인간은 그 구조를 설계하고 해석한다.

     

    이러한 언어적 선택은 현대 사회의 지식 환경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과학, 기술, 정책, 인공지능 시스템은 모두 개인의 직관보다 구조적 판단을 요구한다. 영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요구에 맞게 자신의 문법과 담화 방식을 조정해 왔다. 판단을 문장 밖으로 밀어낸 것이 아니라, 판단을 문장 전체로 확장한 것이다.

     

    결국 영어 문장은 판단을 없앤 것이 아니라, 판단의 위치를 바꿨다. 판단은 더 이상 화자의 목소리에 실리지 않고, 조건과 전제, 결과의 연결 속에서 작동한다. 이 구조 덕분에 영어는 다양한 관점과 수정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었고, 복잡한 지식 체계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구조가 인간의 책임 개념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판단이 구조로 이동한 언어에서, 책임은 어디에 놓이는가.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설계가 현대 사회의 의사결정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어서 분석해 보겠다.

     

    이 글은 언어 구조와 판단 시스템에 관한 정보성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