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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끝내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가

📑 목차

    ― 구조화된 세계에서도 남아 있는 인간 판단의 이유

     

    앞선 글에서 우리는 윤리가 왜 규칙이 될 수 없는지, 그리고 조건·절차·결과로 구성된 판단 구조가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 논의는 하나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판단이 점점 더 구조화되고, 규칙과 시스템이 인간을 대신해 결정을 수행할 수 있다면, 인간은 왜 여전히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판단은 점점 불필요해 보인다. 알고리즘은 더 빠르고, 시스템은 더 일관되며, 규칙은 개인의 편향을 제거해 준다.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개입은 오류의 원인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판단을 완전히 위임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권력 유지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이라는 행위가 구조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은 결과를 산출하는 행위가 아니다. 판단은 선택의 책임을 떠안는 행위다. 시스템은 조건에 따라 결과를 도출하지만, 그 결과가 발생하도록 허용했는지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반면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책임과 결합된다. 판단은 “무엇이 옳은가”를 넘어서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가”를 함께 묻는다. 이 질문은 계산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인간과 기계의 의사결정 비교
    인간과 기계의 의사결정 비교

     

    인간이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판단이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판단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동일한 결과라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따라 판단의 의미는 달라진다. 시스템은 결과를 처리하지만, 관계의 균열을 인식하지 못한다. 인간의 판단은 이 균열을 감지하고, 때로는 결과보다 관계를 우선시한다.

     

    두 번째 이유는 판단이 시간성을 갖기 때문이다. 규칙은 현재의 조건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산출하지만, 인간의 판단은 과거와 미래를 함께 고려한다. 이전의 선택이 남긴 흔적,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와 신뢰에 미칠 영향은 현재의 조건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간은 판단을 통해 단기적 효율보다 장기적 의미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시간적 확장은 규칙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세 번째 이유는 판단이 자기 성찰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판단 이후에 스스로를 다시 평가한다. “그 판단이 옳았는가”라는 질문은 결과가 나온 이후에도 계속된다. 시스템은 실행 이후에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오류가 발견되면 규칙을 수정할 수는 있지만, 그 오류에 대한 도덕적 부담을 느끼지는 않는다. 인간의 판단은 이 부담을 회피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죄책감과 후회의 역할이 드러난다. 죄책감은 계산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판단 주체가 여전히 자신임을 확인하는 정서적 신호다. 인간은 판단을 위임할수록 오히려 책임의 공백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시 판단의 자리로 돌아온다.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판단이 인간을 인간으로 남게 만드는 마지막 경계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만들어낸 구조적 세계는 판단을 문장과 시스템으로 이전시켰지만, 그 이전은 완전하지 않았다. 조건과 결과는 외부화되었지만, 의미와 책임은 끝내 외부로 밀려나지 않았다. 인간은 판단을 구조에 맡기면서도, 그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를 다시 해석해야 하는 존재로 남았다. 이 이중 구조가 바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결정을 다시 직관으로 되돌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구조가 다루지 못하는 영역에서 개입한다. 인간의 판단은 시스템의 대체물이 아니라,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판단은 효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시스템이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간 사회는 판단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대신 판단의 위치를 조정한다. 규칙과 시스템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은 맡기되, 그 결과를 승인하거나 거부하는 최종 결정은 인간에게 남겨 둔다. 이 구조는 느리고 번거로워 보일 수 있지만, 바로 그 느림이 사회의 회복력을 유지시킨다.

     

    결국 인간이 판단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판단은 인간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세계와 맺는 마지막 연결 고리이기 때문이다. 판단을 완전히 위임하는 순간, 인간은 결과의 주체가 아니라 결과의 소비자로 전락한다. 인간 사회는 아직 이 전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이 도달하는 결론은 분명하다. 판단은 제거되지 않는다. 판단은 이동하고, 축소되며, 구조에 의해 보조될 뿐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승인과 의미 부여의 순간에는 여전히 인간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이 판단의 잔여가 교육과 학습의 영역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영어 중심 교육이 인간의 판단 능력을 어떻게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지를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자동화된 판단, 책임 구조, 언어와 시스템의 관계에 대한 정보성 분석을 포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