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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칙 이후에도 인간에게만 남는 감정의 구조
현대 사회에서 판단은 점점 더 구조화되고 있다. 규칙, 조건, 절차, 알고리즘은 판단을 개인의 직관에서 분리해 외부 시스템으로 이전시켰고, 이 과정은 효율성과 일관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현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판단이 규칙을 따랐고, 절차가 정당했으며, 결과가 계산적으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이 글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판단이 문장과 규칙, 시스템으로 이전된 이후에도 왜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자동으로 소멸되지 않는가. 그리고 이 감정이 단순한 심리적 잔여물이 아니라, 판단 구조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을 가리키는 신호일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규칙은 판단을 대신할 수 있지만, 감정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규칙은 판단을 실행한다.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확인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산출한다. 이 과정에서 규칙은 개인의 감정이나 상황 인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규칙의 강점이다. 판단을 빠르고 일관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감은 판단의 실행 결과가 아니라, 판단 이후에 발생하는 반응이다. 규칙은 “무엇이 허용되는가”를 말할 수 있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까지는 다루지 않는다. 죄책감은 규칙 위반에서만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규칙을 지켰을 때 더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죄책감이 규칙의 오류가 아니라, 규칙 바깥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2. 영어는 책임을 구조로 배치하지만, 감정까지 구조화하지는 않는다
영어는 판단과 책임을 외부 구조로 옮기는 데 매우 강한 언어다. 조건문, 정의문, 예외 조항은 판단의 근거를 명확히 기록하고, 책임의 범위를 문서화한다. 이로 인해 판단은 개인의 내적 결단이 아니라, 문장과 절차의 산출물로 제시된다.
그러나 영어는 감정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감정은 정의될 수 있지만, 규칙처럼 실행되지는 않는다. “책임은 규정되었는가”와 “마음이 받아들였는가”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영어는 첫 번째 질문에는 매우 정교하게 답하지만, 두 번째 질문은 항상 열어 둔다. 이 틈에서 죄책감은 발생한다.
3. 죄책감은 판단의 오류가 아니라, 관계의 흔적이다
죄책감은 개인이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많은 경우, 죄책감은 규칙을 지킨 이후에 등장한다. 이는 죄책감이 옳고 그름의 계산 결과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규칙은 행위를 평가하지만, 관계를 완전히 평가하지는 않는다. 판단 구조는 “이 결정이 정당했는가”를 묻지만, 죄책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남았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은 계산으로 닫히지 않으며, 결과가 정당하다는 사실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4. 구조화된 판단과 개인적 책임 사이의 긴장
판단이 구조로 이전되면 책임은 분산된다. 전제는 설계자가 설정했고, 조건은 규칙이 정의했으며, 결과는 시스템이 도출했다. 이 구조는 판단의 투명성을 높이지만, 동시에 책임의 주체를 흐리게 만든다.
이때 죄책감은 책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감정으로 작동한다. 시스템이 결정을 실행했더라도, 그 결정이 현실에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다시 돌아온다. 죄책감은 “판단은 구조에 맡겼지만, 결과를 경험하는 존재는 여전히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5. 죄책감은 자동화의 한계를 표시하는 신호다
자동화 시스템은 판단을 반복할 수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죄책감은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가 아니라, 계산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바로 그 비합리성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죄책감은 판단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다음 판단에서 조건과 기준을 수정하도록 압박한다. 다시 말해, 죄책감은 판단 구조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아니라, 그 구조를 재검토하게 만드는 계기다. 영어가 최종 답을 허용하지 않는 언어가 되었던 이유 역시, 이러한 재검토 가능성을 구조 안에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6. 판단 이후에 남는 인간의 몫
판단은 구조로 이전되었지만, 그 판단을 감당하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규칙은 설명을 제공하지만, 감정의 정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이 간극에서 인간은 판단을 다시 해석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다음 판단의 기준을 수정한다.
죄책감은 이 과정에서 제거되어야 할 오류가 아니라, 판단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에 가깝다. 판단이 구조를 통해 실행되었더라도, 인간은 그 판단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사실이 바로 죄책감이 남는 이유다.
이 글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규칙과 계산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용서’는 누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다음 글에서는
'영어는 왜 ‘설명’에는 강하고 ‘용서’에는 약한가'를 주제로,
조건과 결과로 구성된 언어 구조가 용서와 화해를 다루는 데 왜 한계를 가지는지를 분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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