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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발음 표기의 부재: 왜 영어는 음성문자(phonetic script)를 채택하지 않았는가

📑 목차

     

    언어는 말소리를 기반으로 형성된 체계이지만, 한 언어가 문자로 말소리를 기록하는 방식은 매우 다양한 역사적·정치적·문화적 맥락에 의해 결정되며, 실제로 세계의 많은 언어는 발음을 비교적 정확하게 표기하는 음성 중심 문자 체계로 발전했다. 그러나 영어는 이러한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영어는 발음의 변화를 표기 체계에 반영하지 않았고, 음성문자적 개혁을 거부한 채 고정된 철자 중심의 문자 구조를 유지했다. 이를 두고 많은 학습자들은 영어 철자가 ‘불합리한 언어적 실수’ 혹은 ‘역사적 오탈자 집합’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표기 관습이 유지된 이유는 단순한 보수성이나 무지가 아니라 언어 공동체 내부의 구조적 힘, 정치적 권력의 작용, 교육 제도와 인쇄 산업의 관성, 그리고 무엇보다 발음 변화를 기록하는 음성문자 체계가 영국 사회의 목적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음성문자를 채택하지 않은 핵심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대 영어에서 근대 영어로의 전환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대 영어는 철자가 발음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발음 중심 기록 관습은 게르만 언어 전통의 핵심 특성이었다. þ(thorn), ð(eth), æ(ash), ƿ(wynn) 등 고유 문자를 사용해 실제 음성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르만 정복 이후 이 문자들은 급격히 사라지고 라틴 알파벳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대 영어의 음성문자적 성격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서기관들은 라틴 문자 체계를 도입하면서 영어의 음소적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고, 프랑스식 표기 규칙을 덧입히는 과정에서 영어는 음성문자적 요소를 잃고 점차 어원 중심의 표기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던 시기, 즉 중세 영어기에는 발음 변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특히 장모음이 체계적으로 재구조화되는 대모음추이가 일어나면서 영어 발음은 고대 영어와 완전히 다른 체계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어 전통은 발음 변화를 반영할 수 있는 유연성을 잃고 있었고, 철자는 인쇄술 도입 이후 기술적으로 고정되기에 이르렀다. 인쇄술은 문자 체계를 대량 복사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표기 체계를 수정하거나 개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새로운 철자 원칙이 등장하더라도 기존 인쇄물과 충돌하고, 시장에서 통일되지 않는 배치가 나타나기 때문에 인쇄업자들은 철자를 수정하길 회피했다. 이로 인해 발음 변화와 철자 구조 사이에는 극단적인 불일치가 생기기 시작했고, 영어 표기 체계는 발음이 아니라 시각적 전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영어 발음 표기의 부재
    영어 발음 표기의 부재

     

    영어가 음성문자를 채택하지 않은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 제도와 국가 권력의 작용이다. 근대 영어가 형성되던 시기, 영국은 문해력을 국가적 통제 장치로 도구화하고 있었고, 철자를 표준화하는 것이 지식의 전달과 기록, 행정과 관료 체계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발음 중심의 문자 개혁은 오히려 혼란과 비용을 증가시키는 요소로 평가되었다. 국가와 종교는 언어의 표기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했고, 철자는 발음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권위를 보여주는 도구로 재해석되었다. 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종교 문서가 영어 철자의 권위를 강화하면서, 음성문자는 ‘비표준적’이고 ‘실험적’이며 ‘무질서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더불어 18~19세기 영국 사회에서 사전 편찬자들은 발음을 기반으로 철자를 재정의하는 대신, 인쇄물에 널리 퍼진 철자를 수집하여 ‘정답’으로 규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사무엘 존슨의 사전은 영어 철자표준화의 결정적 도구였지만, 철자의 원리를 재설계하기보다는 당시 문헌에서 가장 흔한 철자를 표준으로 삼았고, 그 결과 음성문자적 개혁은 사전 출판의 흐름 속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존슨은 발음을 기록하는 것보다 언어의 시각적 통일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가 남긴 표기 규범은 교육 체제를 통해 학교로 전파되면서 수세기에 걸쳐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영어는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노아 웹스터는 보다 음성문자에 가까운 철자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의 개혁은 극히 일부만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color, honor, center와 같은 단어에서 프랑스식 철자를 부분적으로 제거한 것은 웹스터의 개혁 성과였으나, 완전한 발음 중심 철자 개혁은 미국에서도 지속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영미 양국이 이미 인쇄 기반 문해 문화를 구축하고 있었고, 경제·행정·교육 영역에서 동일한 철자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웹스터 조차도 완전한 음성문자체계로의 전환은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인정했다.

     

    영어가 음성문자를 거부한 중요한 사회언어학적 이유 중 하나는 권력이 언어 규범을 형성하는 방식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가진 집단의 언어는 발음보다는 문어 중심 규범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문어와 교육은 권력자의 언어를 고정시키는 도구였고, 발음 중심의 변화는 지방 방언이나 하층 계층의 언어 변화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영어의 철자는 상류층의 언어적 전통을 기록한 문어 중심의 산물로 인식되었고, 음성문자적 개혁은 사회적 위계를 흔들 위험 요소로 간주되었다. 즉 문어를 중심으로 언어를 표준화하는 것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일종의 언어 정치학적 선택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더 깊이 탐구하면, 영어가 다른 유럽 언어와 비교하여 발음 표기 개혁을 거부한 이유가 더 명확해진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상류층 언어와 국민국가 형성 과정이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국가적 표준화 기관이 철자를 적극적으로 개혁했다. 그러나 영국은 지역 방언의 다양성이 매우 크고, 영국 내부 계급 구조 또한 다른 유럽 국가보다 훨씬 복잡했다. 발음의 지역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음성 중심 철자 개혁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할 수 없었고, 특정 지역의 발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곧 정치적 불만을 야기하는 일이 되었다. 런던 방언을 중심으로 한 근대 영어 발음 체계가 확립되었지만, 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잉글랜드 북부의 발음은 여전히 매우 다양했고, 음성문자 기반의 표준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영어 철자가 음성문자를 거부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영어가 국제 언어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발음 변형을 흡수하면서 오히려 ‘발음과 분리된 표기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발음의 변화는 더욱 급격해지고 지역 차이는 더욱 심해지는데, 발음에 기반한 표기 체계는 이러한 변화를 모두 반영해야 하므로 안정적인 문자 체계를 유지하기 어렵다. 반면 철자를 발음과 분리하면, 발음은 자유롭게 변화하되 철자는 통일된 형태를 유지할 수 있고, 이는 국제적 의사소통에 필수적이었다. 그 결과 영어는 발음 변화가 매우 커도 철자는 변하지 않는,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진 언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음성문자를 채택하지 않은 영어의 구조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어 학습자는 철자를 보고 발음을 예측하는 것이 매우 어렵고, 발음 규칙도 예외가 많기 때문에 철자와 발음 간의 연결성을 학습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영어 철자의 실패가 아니라, 영어가 세계 언어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발음과 철자의 분리를 통해 언어적 안정성을 확보한 결과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모든 흐름을 종합해보면, 영어가 음성문자 체계를 채택하지 않은 것은 언어적 무질서나 우연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기술적 힘들이 결집된 결과이며, 발음 중심 표기보다 시각 중심 표기가 국제적 언어로서의 영어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철자는 실제 발음을 기록하지 않지만, 언어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고, 교육 제도·출판 산업·국가 체계·사전 편찬 구조가 이 철자를 표준으로 만들었다. 영어의 표기는 음성문자의 부재를 통해 오히려 강한 안정성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도 발음과 철자가 어긋난 복잡한 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구조는 영어의 특수성과 역사적 깊이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